그것은, 실패하는 것.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시도조차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내가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파하지 않으려고 달콤한 말초적 기쁨에 충실하니까, 결국 제자리에 맴맴.
약한 나를 경멸하기 때문에.
주변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드는 앉은뱅이는, 깊은 늪 속에 잠겨버릴 수 밖에 없겠지.
이대로 자멸의 순간까지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건가.
어리광도 적당히 해야 애교로 봐줄 수 있을텐데.
오늘도 연기가 내 몸을 잠식한다.
번정할애(飜情割愛) - 애정을 뒤집어 사랑을 끊어버림
(*애절한 100제, 055. 噓つき - 거짓말쟁이)
4.
시살형(矢殺刑).
제국의 최고형 중 하나에 해당하는 형벌.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럽다는 그 형벌이 지금, 제국의 수도 내에 있는 대광장(大廣場)에서 집행되고 있었다.
사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사사형(賜死刑), 교수형(絞首刑), 총살형(銃殺刑), 참수형(斬首刑), 육시형(戮屍刑)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형벌 중에서 가장 악독하고 처절한 형벌이 바로 시살형이다. 앞에 열거했던 형벌들은 같은 사형이긴 하지만 즉살형(卽殺刑), 즉 형을 집행함과 동시에 바로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시살형의 무서운 점은 가장 짧은 형의 집행기간이 3일이라는 것이다.
그 집행과정은 이러하다.
일단 맨 처음으로 하부 재판청에서 죄인의 죄질을 형량하고, 그에 알맞은 형벌을 결정한다. 그 심사 과정에서 그 죄가 매우 중대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최고형인 사형으로 형벌의 틀을 잡는다. 그 후 상부 재판청으로 사안이 넘어가면 사형 중에서 죄의 성질에 따라 형벌의 방법을 결정한다. 반역죄나 황제시해죄 같은 죄는 최악의 죄질로 평가되는 죄로서, 황제의 은총이 있지 않고서는 시살형을 면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죄를 모두 범한 나츠키에게 시살형이 내려진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니었다.
형의 종류가 결정되고 나면 집행 날짜와 장소가 결정된다. 사사형 같은 경우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내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게 하는 형으로서 그나마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수형이나 시살형은 무조건 공개처형으로 집행하도록 제국의 형법전에 명시되어 있다. 그에 따라 집행 일자와 장소를 집행 일주일 전부터 전 제국에 공포한다.
집행 일자에 다다르면,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죄인을 끌어올려 집행 장소로 수송한다. 집행 장소는 대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광장 등으로 정해지는데, 대체로 죄인이 도착하기 전에 관중들이 몰려 있다. 그 만큼 이런 공개 사형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형을 집행하겠다!”
집행관 하루카의 외침에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일단 광장의 가운데에 새워진 커다란 십자 모양의 기둥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반경 100M 밖으로 몰아낸다. 그리고 병사들끼리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바리게이트를 친다. 그 원을 중심으로 보호막이 펼쳐지긴 하지만, 드물게 관중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죄인을 데려가라!”
병사들은 나츠키의 포박을 풀고 질질 끌다시피 해서 기둥 쪽으로 데려갔다. 나츠키의 기력도 거의 다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기도(氣道)가 봉쇄되어서 기사로서의 회복력도 쓸모없어진 상태였다.
“죄인을 묶어라!”
십자 기둥의 좌우에 양팔을 묶고(나츠키는 한쪽 팔이 잘렸기 때문에 가슴 부근을 한 번 더 묶었다) 양 다리를 모아 묶는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이면 괴로움에 몸부림 칠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츠키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맹독을 품은 독사조차 혀를 내두르며 도망갈 지경이었다.
“사수, 정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수 다섯 명이 십자 기둥의 앞에 나열해 섰다. 그들은 각각 다섯 발씩 화살을 가지고 있었다.
“차렷!”
특별히 높은 명중률을 기준으로 뽑은 사수들이었다. 대역죄인의 형벌을 집행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아주 가끔 심기가 약한 사수가 화살을 잘못 날려 일반 백성이 다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고 보통은 집행관이 거기까지 신경 쓰는 일은 없었다.
“조준!”
드디어 사수들이 허리춤에서 화살을 뽑아 죄인을 향해 화살촉을 내밀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듯 몰려든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연단 위에 앉아있는 황족과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사!”
그렇게, 형벌의 첫째 날을 알리는 효시(嚆矢)가 발사되었다.
시살형에 쓰이는 화살의 촉은 특수한 마법 처리가 되어 있다. 그 마법은 두 가지로, 회복마법과 지혈마법. 화살이 사람의 몸에 날아가 박힌다. 사람의 몸에 닿은 직후 화살촉에 담긴 마법이 신체를 감지하고 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몸에 박히자마자 아물어 파고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은 겉으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사형이었다.
화살촉에는 마법 이외에도 치사량 이하의 맹독이 묻어있기 때문에, 수형자는 화살이 몸에 박힌 고통뿐만 아니라 맹독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조금씩 죽어간다. 차라리 피가 밖으로 흘러내리면 독의 고통만큼은 조금 감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살이 박히고 바로 아물기 때문에 맹독은 몸 안에 고스란히 남게 되고, 죄인은 썩은 피를 가진 채 피부가 까맣게 변색되어 죽을 때까지 독에 고통 받아야 한다.
이 시살형의 집행 기간은 3일, 5일, 7일 중 하나. 집행 기간이 끝나는 날까지 수형자는 그 날의 집행이 끝나고 화살이 뽑히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행해지는 약간의 회복마법. 죽지 않을 만큼 회복시키고 다음날의 집행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마치 코카서스의 바위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렇게 조금씩 죽이다가 마지막 날, 수형자가 죽을 때까지 맹독만이 묻은 화살을 수에 제한 없이 날린다. 그 때는 군중들이 원하던 피가 터지는 장면을 실컷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형이라기보다 거의 생명의 유린에 가까운 형벌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죄가 아니고서는 이 형벌이 집행되지 않았다. 시살형이 집행된 것은 제국이 건국 된 이후로 이번을 포함해 세 번 밖에 없었다.
최초와 두 번째 시살형의 집행 기간은 3일 이었고.
나츠키의 집행기간은 7일 이었다.
“독한 녀석.”
“하루카 집행관…….”
하루카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죄인은 두 번째의 발사에도 불구하고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하루카를 향해 부집행관 키쿠카와 유키노가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독해지는 거지?”
“그건 당사자만이 알 수 있겠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나츠키 씨. 라고 뒷말은 씁쓸한 혀 뒤쪽에 녹여버렸다.
어떤 격렬한 고문을 가해도 나츠키는 반역에 관하여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그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물었지만 그녀의 입은 자물쇠가 채워진 양 열리지 않았다. 피가 튀고 살이 깎이는 그 치 떨리는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보다 더한 고통도 겪어봤다는 것일까.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유키노의 옆에서 으드득, 손톱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믿음직한 신하였어! 가장 경애 받는 동료였어! 제국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을 녀석이 뒤통수를 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미 세 번째의 발사 시간은 지났다. 점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던져지는 이물질이 늘어났다. 유키노는 이제 자신이 초조해진 얼굴로 하루카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유가!”
이렇게 탐탁지 않은 재판도 처음이었다. 무슨 사건이든 이유가 있게 마련인데, 이번 경우에는 도통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제국을 전복하여 온당한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라고? 웃기지마. ‘그 쿠가 나츠키’가 그딴 목적을 가질 리가 없다. 미쳐버렸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미칠 리는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미친 것 같지는 않았고.
“차라리 미쳤다고 하는 게 나을지도.”
하루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츠키의 급변한 모습은 마치 뭔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지금도 황제를 향했던 서슬 퍼런 광기의 눈동자는 잊을 수가 없었다.
“하루카 쨩… 발사 명령을 내려야…….”
초조해진 유키노는 저도 모르게 평소의 호칭으로 하루카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하루카의 상념이 현실로 돌아왔다.
“……알고 있어.”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린 지휘봉을 높게 들었다. 봉의 끝에 달린 붉은 술이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루카쨩…….”
하루카의 넓은 이마는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다.
넌 정의를 저버렸어.
이 결과는 당연한 거야.
그래, 알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발사 명령을 내리는 게 망설여지는 거야?
-5.
창문에 걸린 햇살이 반짝 움직인다. 하루카는 복도를 걸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안 좋은 일 때문에 책임자를 심판하고 관련 법률을 새로 제안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날씨 좋은 날이면 빠짐없이 놀러나간다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근 한 달 가깝게 책상머리에 처박혀 있는 것도 성미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 이다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법(法)과 정의(正義)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그것을 수호하는 직접적인 업무가 주어진 법무대신이라는 자리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노력에 보상받을 만큼 훌륭한 결과물들을 내놓았으며 그 노력과 결과들이 황제의 눈에 들어 법무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이번 황제가 즉위하면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인사명령을 내렸는데 그 중의 한명이 바로 스즈시로 하루카, 자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대상이 바로 나 스즈시로 하루카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 만큼 ‘정의, 정의, 정의’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너무 고지식하고 딱딱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주변으로부터 다소 듣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정의(正義)’는 ‘정의(正意)’였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였다. 옳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올바름을 향해 인생을 움직이는 것만큼 멋진 일이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올바름,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 걸친 최고의 목표였다. 그 목표를 위해 가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었다.
-똑똑
황궁의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소궁. 본래는 황제의 후궁이나 품계를 받지 못한 측실들을 위해 마련된 궁이지만 현 황제의 특성상 쓰일 일은 없었다. 황궁의 부지 안에 이러한 소궁들이 수 십 개 씩 세워져 있으니, 황궁이 얼마나 큰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얼마 전부터 황제의 명령에 의해 한 사람이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얼마 전’은 하루카가 근 한 달간 바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일어났던 날과 일치했다. 호위 기사들이 하루카를 알아보고 목례하며 문 앞에서 비켜섰고, 하루카는 필요 없는 일이었지만 예의 상 문에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미성이 섞인 그 목소리는 하루카가 알고 있는 목소리보다 약간 힘이 빠져 있었다.
“실례.”
하루카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방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녀들이 청소를 안 한 건가? 한마디 해야겠군. 볕이 잘 비치는 창가에 놓인 침대에 초록색 눈을 빛내고 있는 미인이 상체를 기대어 앉아있었다. 요양 중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항상 목 근처에서 묶여 있던 푸른빛의 흑발이 제멋대로 풀어져 있다. 그것은 강인한 그녀를 어쩐지 유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미지였지만. 지금 이 제국에서 그녀와 대련하여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니 요양 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침대에서 꾸물거리는 모습도 상당히 웃긴 일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많이 나아졌어요.”
나츠키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침대 가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먹다 만 사과 조각이 접시 위에 담겨 있었다.
“누가 왔다 갔나?”
“아, 황제 폐하께서 잠시…….”
“폐하도 열심이시구먼. 바쁠 텐데.”
나츠키는 미미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카는 사과를 집어 한입 베어 물면서 물었다.
“으적으적,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만, 그 사과 먹은 것을 알면 폐하께서 호되게 혼내실 걸요.”
“하, 이 애과 호자 기뤈 이로(이 내가 고작 이런 일로), 꿀꺽, 혼날 것 같아? 사과 쪼가리 하나 먹은 거 가지고 쩨쩨하기는.”
“저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쩨쩨해지지 않습니까, 폐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저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입에 담는다. 하루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남은 사과를 씹었다.
“흥. 바퀴벌레들 같으니라고.”
꿀꺽, 사과조각을 삼키고 테이블에 비스듬히 턱을 괸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지?”
“그냥 이야기나 할 까 해서요.”
“그냥 이야기? 한가한 잡담이나 할 정도로 내가 여유로워 보이던가?”
하루카는 콧방귀를 뀌며 나츠키를 노려보았다. 아직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주제에, 얌전히 누워서 잠이나 잘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사실 하루카는 나츠키를 그다지 곱게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그 실력이 출중하고 충성심이 몸에 배인 기사라 해도 그의 가문으로부터 이어받은 핏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핏줄이나 신분 등에 연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하루카지만, 몇몇 특정 인물들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그 예외라는 것이 하루카의 성격에 맞지 않아 괴리를 불러일으키고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요, 한가한 잡담일지라도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싶어서.”
“무슨 말이야? 다들 병문안 오지 않았어?”
“병문안이야 많이 왔지요, 당신을 포함해서. 폐하 같은 경우야 매일 수시로 들르고 있지만.”
“아아, 그 얘긴 됐어. 내가 당신들 연애상황 보고 받으려고 불린 것 같진 않은데.”
“아하하, 미안합니다. 요즘에 입이 좀 가벼워졌어요.”
그리고는 침묵한다. 확실히 입이 가벼워지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필요한 말만 딱 하고 말 것을, 전에 병문안 왔을 때도 뭘 그리 조잘조잘 떠들어대는지. 다치고 나서 어딘가 변했다는 게 나츠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스즈시로 백작께서는 ‘정의(正義)’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런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하루카는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일까? 역시 아프더니 사람이 살짝 맛이 가버렸나? 아니면 따로 생각해둔 게 있는 건가.
이런 화두는 하루카의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것이었기에 순순히 질문에 응했다.
“정의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올바르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념의 영역이다.”
하루카의 대답에 나츠키가 미간을 좁힌다.
“그럼, 그 신념이라는 것은 결국 주관적인 사람의 생각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신념으로 삼든 정의가 될 것이고, 세상에는 수천수만의 정의들이 난무할 텐데요.”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었군. 정의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것이라고 그 앞에 말했다. 그 흔들림 없이 올바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은 절대적인 신념이고요?”
“그렇지.”
이 무슨 난데없는 철학적인 대화인가.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 투성이었는데. 하루카는 편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츠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자신이 생각한 그 정의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올바르며,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정의에 배치된 사람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라 말해도 그것은 정의가 되는 겁니까?”
“절대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믿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그를 포함한 만인의 의지이며 만인의 의지를 이끄는 세상의 의지이자 신의 섭리에 속하는 영역이다. 고작 일개 인간이 믿고 행하는 의지 따위가 정의가 될 수는 없는 거야.”
“너무 추상적이군요. 신의 섭리까지 끌어들이고.”
하루카의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이런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있어 절대불멸의 신념이었으니까. 나츠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었다.
“뭐야, 뭐야, 그 태도는. 내 말을 이해 못 한 거야?”
“아니오, 이해는 합니다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군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도 꼴사나운 짓이지.”
방 한구석에 머물러 있던 나츠키의 시선이 하루카를 향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안광에서 뿜어져 나온 어떤 기세는 하루카조차 숨을 멈추게 만들었다. 나츠키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직 햇살은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너…… 대체 뭐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다시 돌려본 나츠키의 짙은 녹 빛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허약했고- 슬퍼보였다.
“스즈시로 백작.”
하루카는 입맛을 다셨다. 입안이 메말라 있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분위기에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듣게 될 말은 무슨 말일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 있습니까?”
“뭐?”
나츠키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웃음은 그녀의 온 몸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퍼졌다. 높이 새어나가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갈무리되어 요동치는 웃음소리. 그것은 차라리 섬뜩할 정도였다.
“그것이, 현재 나의 ‘정의(正義)’입니다.”
하루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의 섭리조차 울고 지나갈 절대적인 신념이 그곳에 자리해 있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시간 이후의 당신 자신에게도.”
하루카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나츠키의 기묘한 안광이 하루카에게 암시를 걸어, 그들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잊게 만들었다. 저 눈빛, 저 쿠가 가문의 눈빛, 저 녹색의 음울한 눈빛, 정말 싫다- 고 생각하는 찰나, 하루카는 그 마지막 생각조차 잊어버린 상태로 나츠키의 방을 나서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이 잃어버린 대화는 훗날, 하루카가 평생에 걸쳐 후회하는 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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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얍.
이 연재물은 꼭 마무리짓고 싶네요.